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청춘의 고전 시즌2]-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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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고전 시즌2 /그림으로 읽는 철학] – ⑪

?? 일시: 2012. 8. 25.?(홍대입구 상상마당 강의실)

이것은 누구의 구두입니까?

– 반 고흐의 <구두>와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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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서영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철학’과 ‘예술’ 이 두 영역은 인간이 역사 행위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가장 ‘문화화’된 창조성의 산물이다. 이 두 영역의 활동을 통해 세상은 드러나고 해석되며 지속된다. 그렇다면 철학과 예술은 서로 어떤 관계이고 철학은 예술을 어떻게 보는가? 보이고 감각하는 이 세계의 것들을 예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예술적 감성과 세계를 자신의 눈으로 해석해내고 설명하려는 이성적 사유는 언뜻 보면 닮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아주 달라 보인다. 이 차이가 이 둘 사이의 얘깃거리가 된다.

열한 번째 시간에는 ‘철학자가 이해하고 생각한 예술’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철학자들이 이해했던 예술에 대한 여러 개념을 기반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선대 철학에 대한 물음과 극복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서양 철학사에서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극복 양상과 하이데거의 예술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강의를 맡은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를 소개하면서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자, 나치 부역자, 신비주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전적으로 맞거나 부분적으로 맞는 말일 수 있음을 주지하게 하면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서양철학사가 서구 형이상학과의 대결의 역사였다는 단서를 전제해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하이데거는 철학사 전체의 핵심 근거에 대해 문제시하고, 그러한 근거 자체를 ‘근거 없는(grundlos) 것’으로 만드는 사상가”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자명한 것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핵심에는 ‘철학의 종말’을 선언했고 대안으로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얘기한 하이데거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철학과 예술의 대결 : ’철학의 종말’과 대안으로서의 예술

하이데거가 말한 ‘철학의 종말’은 철학 일반의 종말이 아니다. ‘형이상학의 종말’을 말한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의 특징에 대해 “서구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을 해체했다는 것이 다른 철학자와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니체와 헤겔까지의 철학을 한 주름으로 꿰어버리고 이것이 서양의 전통적 틀이라고 규정하면서 하이데거 자신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고 한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철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는데 서영화 교수는 기본적으로 플라톤-니체-헤겔-하이데거의 순으로 큰 축을 설정한다. 단적으로 설명하면 플라톤은으로 보았고, 니체는을 역설했다. 그러나 헤겔에 가서는 다시으로 규정된다. 이후 하이데거는 다시 철학의 종말을 주장하고 철학의 자리에 예술을 등장시킨다.

플라톤에게 있어 예술은 하나의 가상을 만드는 것이고, 철학은 이론적 지식을 통해 참된 것에 대한 앎에 도달하게 만들어 준다. 철학은 참된 ‘이데아(idea)’를 이끌어주는 것으로 수학-기하학은 이데아의 앎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플라톤의 경우 이데아는 생성-소멸의 과정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감각적 경험세계의 생성-소멸에는 참된 것이 없다.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이데아에 대한 2차적인 모방이며 ‘오디세이아(odysseia)’와 ‘일리아드(Iliad)’처럼 광폭하고 음란한 신들에 대한 묘사와 현실 속의 인간을 운명에 대해 비탄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플라톤은 교육에 있어 ‘철학과 예술 간의 대결’을 선언하면서 기존 공동체 내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예술을 대신해 철학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니체는 플라톤적 진리관은 인간 생의 보전을 위한 가치로써 삶의 지지대나 의지처로 파악한다. 니체는 생동하는 현실세계를 중심으로 1차적 관계를 맺는 것이 진리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예술이라고 본다. 니체의 예술론은 세계를 지배해 오던 형이상학적 가치가 전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될 때(심연 속으로 몰락;니힐리즘의 도래) 비로소 인간에게 새로운 의지가 발현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존재자를 존재자이도록 하는 것은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 will to power)’이고 예술은 이것을 가장 투명하게 드러내어 변화무쌍한 현실을 왜곡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형태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니체 또한 형이상학자로 이해한다. 니체의 진리관은 분명 플라톤의 개념을 전도한 것이지만 니체에게는 ‘힘에의 의지’의 강화가 모든 생명체들의 본질이 된다. 이것을 하이데거가 볼 때는 플라톤의 이데아 성격과 같다는 것. 서영화 교수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바깥의 무시간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이해해야만 인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니체도 형이상학자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부연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예술작품도 ‘영원히 정지한 시간성’과 ‘불변성’의 방식을 가지고 만들어졌다면 이것은 형이상학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전통적으로 존재자를 ‘형상+질료’의 조합으로 규정하는 것은 개별사물을 이분법으로 설명하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이 때 전통적 규정에서 중세까지 형상의 자리를 차지하던 것은 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철학의 근본 물음인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라는 존재자의 원인과 본질의 탐구 끝에는 결국 신을 설정할 수밖에 없던 사실이 존재하고 이를 참으로써 보증하는 것이 논리학의 역할이었다. 이 역할을 논리학적 방식 보다 예술의 방식을 통해 더 잘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입장이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의 필요성은 형이상학적 틀과 논리학의 만남으로서 서구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해온 철학이 종말을 고해야할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

1) 사물과 도구, 그리고 예술작품

▲ 샘(Fountain), 1917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위 그림은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변기라고 불리는 마르셀 뒤샹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이다. 1917년 뉴욕의 전시회에서 전시되었지만 전시회장 밖에서 전시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으며, 37억 달러를 호가하는 예술작품이 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질문: 기성품을 예술가가 일상적 환경이나 장소에서 빼내와 예술작품이라 선언하면, 예술작품이 되는가? 무엇이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과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어디인가? 이런 의문들을 정리해보면 아마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본질은 예술가에게 있고 예술가의 본질은 작품에 있으며 작품의 본질은 다시 예술에 있다’라는 문구처럼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순환에 빠진다는 것을 하이데거는 문제 삼는다.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작품은 예술가 자신이 활동한 결과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예술가일 수 있는 것은 예술작품을 통해서다. 형이상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물이 사물이도록 하는 본질에 대한 물음과 규정에 있다. 하이데거의 경우 ‘사물’을 다른 말로 하면 ‘존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존재자의 본질을 형이상학적 사유 전통에서 찾기 거부하는 하이데거는 예술의 본질과 근원에 대한 물음을 실제 예술작품으로부터 묻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물인가? 단적으로 말하면 무(無)가 아닌 존재자 일반이 사물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사유 전통 내에서 사물에 대한 해석은 다르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이해한 사물에 대한 조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형이상학 전체를 지배하는 ‘형상+질료’의 결합 틀이 예술이론과 미학의 개념 도식이 되고 이 개념 도식이 근대 이후 형상의 자리에 인간이 들어오면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주체-개체’의 도식과 만나 서구 사회에서 사물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개념역학’이 된다”는 것. 이에 의해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존재하는 것을 도구로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형상+질료’ 결합 틀의 근원은 사물의 본질이 ‘도구적 용도성’에 있다는 견해이다. 이 지배하에 있는, 예를 들면 항아리ㆍ망치ㆍ신발과 같은 존재자는 어떤 것을 위해 제작된 산물로서 사물과 작품 간의 고유한 중간 위치에 있다.

문제는 서구 사회가 이 도구 존재자에 대한 이해 틀을 모든 존재자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 틀로 간주하고 있다는데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하는 것 자체(사물)를 도구로 이해하는 것을 ‘사물에 대한 습격’이라 명명했고 이 ‘도구적 용도성’을 벗겨낸 것을 ‘사물’이라고 한다. 도구는 유용한 것으로 친숙하고 사물은 낯선 것이 되면서 ‘폐쇄성’을 가지고 ‘은폐’된다.

2) 고흐의 신발 도구와 용도성의 본질

하이데거가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분석하는 “고흐의 신발(ein Paar Bauernschuhe von Gogh)”은 사물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도구에 대한 분석이다. 하이데거의 전략은 형이상학의 내부 깊숙한 곳에서 형이상학의 파괴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물=도구’라는 인식 틀에 대해 사물이 진정 무엇인지 알려주겠다는 의도이다.

▲ 신발(A Pair of Shoes), 1886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작품에서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가 드러난다고 한다. 작품 ‘신발’에 대한 하이데거의 감상은 축약하면 이렇다.

“신어서 틀어지고 헤어진 신발 안쪽의 어둡게 열려진 틈 속에서 노동의 고단함이 보이고 신발 도구 속에서 거친 바람이 부는 들녘의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완고함이 보인다”ㆍ”신발을 통해 생계를 해결해야하는 농부의 근심과 들녘에 나가 편하게 일할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출산과 죽음 앞에서 나타나는 초조와 전율이 보인다”

신발 도구 속에서 대지와 농부의 세계가 함께 보인다는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 때 재현의 대상인 신발은 어느 특정한 누구의 신발이 아니고 도구 연관 전체로서 ‘농부의 세계’를 드러내준다고 한다. 세계를 보는 농부의 시선과 삶의 지향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은 농부가 신발을 신는 일상 행위에서도 나타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때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신뢰성’에 있다. 누군가 신발을 신었는데 그야말로 아주 편해서 신발이 신발 역할을 잘 할 때가 가장 신발다운 때이고 이렇게 되면 신발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다른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신발을 신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신발이 사라져버리는 그 지점에서 ‘신뢰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망치도 더 이상 망치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가 망치가 가장 망치다울 때이다. 회화작품을 그리는 도구도 마찬가지인데 하이데거는 도구를 하나의 관찰대상으로 삼게 되면 도구답지 않게 된다고 한다. 그 때는 ①도구가 고장 났을 때, ②도구를 과학적 관찰대상으로 삼을 때”이다. 하이데거의 말로 이어나가보면 “도구가 갖는 용도성의 본질은 1차적으로 신뢰성에 있고 신뢰성의 특징은 평소에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 신뢰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찰나의 순간이다. 플라톤적 진리처럼 신발의 본질은 신발의 이데아계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절대 불변하는 객관적인 ‘참’인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참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술작품은 ‘존재자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준다. 고흐의 그림에서 신발은 일상적으로 보았던 곳과는 다른 곳에 위치한다. 즉 작품 안에서 작품 존재로 있게 되는데 이 때 우리가 평소에는 인식할 수 없던 용도성의 본질인 신뢰성을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도구 존재가 참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예술작품이라고 한 것이다. 본질을 은폐하려는 사물의 성향을 풀어헤쳐서 보여주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고 예술작품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고 본다.

작품과 진리

하이데거에 의하면 예술작품은 “세계와 대지의 투쟁을 일으키는 것(선동, 사주)”이고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가 투쟁하는 것을 격돌시키는 역할을 하며 그 자리에 촉매처럼 위치해 있다. ‘투쟁’이란 세계와 대지를 긴밀하게 공속(共屬)시키는 친밀한 통일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영화 교수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와 ‘대지’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란 고흐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농부의 세계처럼 삶이 결정되는 순간 그 자리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곳이 된다. ‘대지’는 말하자면 인간이 체류하는 고향과 같은 거처로서 하이데거는 대지를 질료와 같은 개념으로 쓴다. 이른바 ‘스스로 그러한(自然)’ 질료적 성격을 보유하고 있는 사물 고유의 성향이다. 이것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태도에서는 사라진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대지의 성격, 질료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비로소 그것을 최초로 솟아나게 한다. 고흐의 회화작품에서 ‘농부의 세계’와 ‘대지’는 ‘개방’되면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세계가 대지 위에 근거하는 것임을 드러내 보인다.

작품 안에서 농부의 세계와 농부가 딛고 살아가는 땅-대지가 신발 안에서 투쟁하게 만드는 것이 고흐가 만들어낸 결과이다. 진리는 무시간적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를 생겨나게 하는 것은 예술가의 몫이 아니다. 예술가는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를 서로 격돌하게 만들뿐이고 그것의 결과가 진리의 생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 안에서 세계와 대지의 내밀한 통일과 투쟁의 격돌 속에서 진리가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서영화 교수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의 격돌로서 이해할 수 있는 예술작품의 사례로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암’을 든다. “일제강점기 석굴암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이후 지금까지 최초에 조성되었던 당시의 본 모습을 잃어버렸다. 현재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결로(結露)현상인데 애초에는 본존불이 앉은 바위 밑으로 감로수라는 샘물이 흘러 자연적으로 결로현상을 막을 수가 있었다. 과거에는 석굴암이 감로수를 차단하지 않고, 화강암이라는 질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예술작품이었던 것이다. 인간과 절대자가 만나는 장인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당시 신(神)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세계에 대한 이해와 석굴이라는 대지가 투쟁의 격돌로서 드러나는 예술작품이었다”

진리와 예술

하이데거는 보이는 대상 A자체가 참으로 드러나야지만 보는 주체 B도 A를 참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개념화해서 말하면, 참된 인식은 이성적인 표상 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사물 자체가 스스로 발산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물의 ‘개방력’이다. 사물이 그 자체로 드러나 있어야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는 것. 사물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작품 안에서 ‘사물의 세계’와 ‘사물이 속하는 대지’가 충돌한 결과가 ‘참으로 그렇게 있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사물 자체가 ‘개방력’을 가지고 있고 이 개방성이 열릴 때 우리는 존재자를 그 존재자 자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세계와 대지의 투쟁이 내적인 통일 속에서 석굴암의 본존불상처럼 형태로 확립되어 있을 때 감상자는 “그것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선다. 즉 존재자의 개방성이라는 적막한 충격 앞에 세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서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던 것으로 부터 벗어나게 된다.

고흐의 신발 그림을 봤을 때 감상자는 여기에 ‘신발이 없지 않고 있다’라는 그 사실을 느끼게 되고 하이데거는 이것이 매우 적막한 충격으로 감상자에게 다가온다고 한다. 서영화 교수는 ‘없지 않고 있다’고 느끼는 태도는 하이데거적 언어로 말하면 존재자가 참으로 개방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익숙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감상자가 예술작품을 볼 때 사물을 도구적인 것으로 보는 익숙함에서 벗어나 비은폐화되어 드러난 존재자의 본질을 자각하게 되면 작품 감상자는 작품의 보존자가 되어 작품을 비로소 현실적이고 예술작품답게 만드는 전환을 이루어낸다. 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일상의 기성품에서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의 예술작품으로 변환된 사실이 이 사례이다. 그렇다면 작품 안의 작품존재 속에서 진리가 생성된다는 존재자의 ‘개시성(開示性)’이야 말로 예술작품을 예술작품이도록 하는 최종 근거가 된다.

서영화 교수는 마지막으로 앞의 얘기들을 정리하면서 하이데거의 예술론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얘기를 덧붙였다.

“현재 우리는 인간을 인적자원, 자연을 자연자원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유익하고 유용한 것은 ‘있는 것’으로 치부하고 자신에게 유용하지 않은 것은 ‘있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이런 태도는 평소에는 매우 친숙하다. 하지만 일상적인 대상 사물이 작품 안으로 옮겨가게 되면 친숙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게 된다. 하이데거의 경우 ‘없지 않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면 내 앞에 있는 그 무엇을 나에게 유용한 대상으로 보지 않게 된다. 대상에 대한 자각 이전과 이후의 태도가 전혀 다르게 된다. 확대해보면 내가 자연을 대하는 방식자체가 전혀 달라진다. 결로현상 때문에 석굴암에 에어컨디셔너를 달았다는 사실이 일상의 감상자에게는 처음에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과거에는 이런 장치가 필요 없어도 석굴암이 유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물을 우리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태도도 전혀 달라지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곧 통상적인 행위와 평가에 대해 조심스러워지고, 자신의 지식과 시야를 함부로 적용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의 철학과 대결한 이유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에 예술이 필요한 이유이다”

후기: 진보성 (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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